무식한 훈장 지친다리를 쉬어갈 겸 김삿갓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절이나 서당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옛날에는 절이나 서당 같은 데서는 아무리 낯선 손님이 찾아와도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미풍 양속이 있었다 한다. "여기서 20리쯤 가면 성미재 라는 서당이 있소" 하고 대답한다. 이윽고 성미재에 도착하니 낡아빠진 유관을 쓴 훈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면 거만하게 묻는다. "댁은 어디서 오는 길손이요?" "양주(楊洲)에서 오는 사람입니다.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들렸습니다." "양주라, 엊그제도 양주 손님이 하나 다녀갔는데 또 양주에서 왔다구. 아무튼 이리로 들어 오시오." 다행히 쫓아내지는 않을 모양이나 매우 귀찮게 여기는 태도였으며, 서당에는 10여명의 학생들이 책을 보고 있으나, 열이 하나 같이 천자문(千字文)이나 계몽선습(啓蒙先習)을 읽는 조무래기 뿐이고, 고작 큰 아이라는 것이 겨우 사략(史略)을 읽을 정도였다. 겨우 자리에 앉으니 사략을 읽고 있던 아이가 책을 들고 와서 "선생님, 이게 무슨 글자 입니까?"하고 묻는데, 김삿갓이 얼른 넘어다보니 '동일 요(繞)'라는 글자였다. 그러나 훈장은 암만 보아도 알 수 없는지 별안간 눈을 비벼대며, "내가 돋보기가 없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구나. 내일 돋보기를 가지고 와서 가르쳐 줄 테니 그리 알고 있거라."하고 그냥 넘어가버리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서당을 지어준 풍헌영감에게는 방귀 냄새도 달콤하다고 아첨을 하니, 이 모양을 보고 김삿갓은 가만있을 수 없었다.
낡은 관 높이 쓰고 가래침 뱉아 대네 고작 높은 제자가 사략 읽는 아이요 가깝다는 친구는 풍헌 영감이더라. 山村學長太多威 (산촌학장태다위) 高着塵冠唾타投 (고착진관삽타투) 大讀天皇高弟子 (대독천황고제자) 尊稱風憲好朋주 (존칭풍헌호붕주) 모를 글자 만나면 눈 어둡다 핑계 대고 주석에선 늙었노라 술잔을 먼저 받네 서당 밥 한 그릇에 생색내며 하는 말이 금년 과객 모두가 양주 사람이라네. 每逢忘字憑衰眼 (매봉망자빙쇠안) 輒到巡杯藉白籍 (첩도순배자백수) 一飯횡堂生色語 (일반횡당생색어) 今年過客盡楊洲 (금년과객진양주)
김삿갓은 언제나 빈털터리로 떠돌아 다니면서도 술집만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술이야말로 그에게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친구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김삿갓에게는 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남은 엽전 일곱 푼도 오히려 많구나. 주머니 속 깊이 있으라고 다짐했건만 석양 주막에서 술을 보았으니 내 어찌하랴. 千里行裝付一柯 (천일행장부일가) 餘錢七葉尙云多 (여전칠엽상운다) 囊中戒爾深深在 (낭중계이심심재) 野店斜陽見酒何 (야점사양견주하)
김삿갓이 어느 산골을 넘어가고 있는데 너무도 애달프고 구슬픈 곡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소리를 따라 가보니 초라한 오두막집에 사십세 가량 되어 보이는 사나이와 오십이 넘었을 듯싶은 노파가 시체를 부둥켜잡고 울고 있는데, 시체를 눈여겨 보니 스무살도 채 못 돼 보이는 색시가 아닌가.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던 사나이는 얼굴을 들고 김삿갓을 보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넑두리를 하는 것이었다. "시집 온 지 열흘도 못 된 내 색시가 죽었다우. 사십이 넘어 가까스로 장가를 들었는데, 새색시가 죽었으니 이를 어쩌면 좋수?" 사십이 넘도록 숫총각으로 지내다가 가까스로 얻어 온 새색시가 죽었다니, 사나이의 애통한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인생 무상이니, 인생은 초로 같다느니, 하는 말은 흔히 써 오기는 하지만, 이처럼 허무한 죽음이 어디 있으랴 싶었던 것이다. 몇일후 문상객 몇 사람과 장사를 치르게 되었다. 장모는 상여채를 붙잡고 따라오며 슬픈 넋두리를 계속한다. "아이고 아이고, 내 딸이 죽다니! 말씨도 곱고 재주도 많은 아이였는데, 아이고 아이고, 내딸이죽다니!" 김삿갓은 그 광경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만장을 한 수 쓰게되었다.
기쁨은 못 누리고 슬프기만 하구나 젯상에 부은 술은 혼인 때의 술이요 수의로 입은 옷은 시집올 때 옷이네. 遇何晩也別何催 (우하만야별하최) 未卜其欣只卜袁 (미복기흔지복원) 祭酒惟餘醮日釀 (제주유여초일양) 襲依仍用嫁時裁 (습의잉용가시재) 창가엔 복사꽃 간간이 피어 있고 발 넘어 둥우리엔 제비가 나는데, 딸의 성품 어떠냐고 장모에게 물으니 재주는 그만이라 울면서 대답하네. 窓前舊種少桃發 (창전구종소도발) 簾外新巢雙燕來 (렴외신소쌍연래) 賢否卽從妻母問 (현부즉종처모문) 其言吾女德兼才 (기언오녀덕겸재)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좀 더 있어야 되지 않을까. 나 자신이 부끄러워 진다.
김삿갓은 언덕길을 혼자 걸어 가고 있었다. 기나긴 고갯길을 무심히 걸어 올라 오다가, 별안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좁다란 오솔길 위에 시체 하나가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언제 죽었는지 몰라도 썩어 가는 시체에는 파리 떼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시체 옆에는 쌀이 조금 들어 있는 뒤웅박과 지팡이 하나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시체의 주인공은 거지임이 틀림없다. "쯧쯧쯧! 거지도 사람인데, 이 사람이 어쩌다가 깊은 산중에서 이 꼴이 되었을까!"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도 하나의 걸객(乞客)에 지나지 않으므로 김삿갓은 눈앞의 시체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김삿갓은 시체를 매장해 줄 생각에서 삿갓과 두루마기를 벗어 부쳤다. 시체를 오목한 장소에 끌어다 놓고 여기저기서 흙을 옮겨다가 무덤을 만들어 주자니, 무덤답지 못한 무덤을 만들어 주는 데도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김삿갓은 무덤 앞에서 고개를 깊이 수그려 절한 뒤에, 다음과 같은 시를 소리 내어 읊었다.
그대의 고향은 어데이던고 낮에는 썩은 몸에 파리가 들끓더니 저녁에는 까마귀가 고혼을 울어 주네. 不知汝姓不知名 (불지여성부지명) 何處靑山子故鄕 (하처청산자고향) 蠅侵腐肉喧朝日 (승침부육훤조일) 鳥喚孤魂弔多陽 (조환고혼조다양) 짤막한 지팡이는 그대의 유물이오 몇 됫박 남은 쌀은 구걸한 먹거린가 마을 사람들은 내 말 좀 들어 보소 흙 한 줌 날라다가 풍상이나 가려 주지. 一尺短공身後物 (일척단공신후물) 數升殘光乞時禮 (수승잔광걸시예) 寄語前村諸子輩 (기어전촌제자배) 携來一궤掩風霜 (휴래일궤엄풍상) 별로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살다가 죽음을 맞게 되면 최소한 스스로는 미소를 지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술을 마시며 살아간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도 술을 좋아 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란 생각을 한다. 술 한잔 못 마시는 사람에게는 왠지 바보 같다는 생각도 해버리는 세상이다. 그 유명한 이태백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었고, 김삿갓도 이에 못지 않았으니 술은 우리를 자유롭게도 천(賤)하게도 만들어 버리는 애물단지요 필요악인 존재인가 보다. 그럼 김삿갓이 술에 대해 지은 시 한 수를 읊어 보기로 하자.
취한 뒤에 또 마심은 없느니만 못 하다.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하고 계집이 남자를 미치게 하는 게 아니라 남자가 스스로 미친다. 渴時一滴如甘露 (갈시일적여감로) 醉後添盃不知無 (취후첨배불지무) 酒不酒人人自醉 (주불주인인자취) 色不迷人人自迷 (색부미인인자미)
김삿갓이 어느날은 산길을 가다 날이 저물어 우연히 변서방이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머물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마누라가 아이들과 함께 친정에 가고 없어서, 오늘밤은 나 혼자예요. 방에 들어가 잠시만 기다리세요." 변서방은 방안에 들어와 등잔불을 켜 주었다. 살림 기구라고는 방 한복판에 화로 하나가 덩그마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마누라가 없는 탓인지, 화로에는 불이 싸늘하게 꺼져 있었다. 그 화로라는 것은 커다란 통나무 뿌리를 캐어다가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어서 모양새가 얼른 보기에는 호랑이 대가리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고래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화로 하나만 보아도 변서방의 소박한 생활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화로의 모양이 하도 괴상스러워 김삿갓은 화로를 이모저모 바라보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화로(火爐)'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한 수 읊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이도저도 아니로다 만약 불을 활활 달게 피워 놓기만 하면 호랑이도 고래도 구워 먹을 수 있으리. 頭似虎豹口似鯨 (두사호표구사경) 詳看非虎亦非鯨 (상간비호역비경) 若使雇人能盛火 (약사호인능성화) 可煮虎頭可煮鯨 (가자호두가자경)
그렇게 검소한 변서방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변서방은 삶은 감자 한 소쿠리와 네다리 소반위에 죽그릇을 놓아 가지고 들어오며 말한다. "몹시 시장하셨지요?" 그런데 소반 위에는 죽이 한 그릇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사람은 둘인데 죽은 왜 한그릇만 가져 오셨소?" 변서방은 계면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나는 평소에도 감자만 먹고 살아온다오. 손님한테는 감자만 대접하기가 미안스러워 쌀독 밑바닥을 긁어 가지고 죽을 한 그릇 쑤어 왔지요. 그러나 워낙 쌀이 몇 알밖에 없어서 죽이라는 것이 마치 맹물과 같이 되어 버렸군요. 죽을 자시고 나서 감자를 더 드세요." 김삿갓은 주인 양반의 알뜰한 정성이 고맙기 그지 없었다. 오다 가다 만난 사람에게 그처럼 알뜰한 정성을 베풀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 것인가. 아닌게 아니라 죽그릇을 들여다보니 그것은 죽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맹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주인 양반의 성의를 생각해 몇 숟갈 떠먹다 보니 죽은 맑은 물과 같아서 죽그릇 속에 김삿갓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김삿갓은 죽을 떠먹어 가면서 다음과 같은 운치 있는 즉흥시를 읊었다.
하늘에 떠도는 구름 그림자가 비치네 주인 양반 조금도 무안해 할 것 없소 나는 본시 물에 비친 산을 사랑 한다오. 四脚松盤粥一器 (사각송반죽일기) 天光雲影共徘徊 (천광운영공배회) 主人莫道無顔色 (주인막도무안색) 吾愛靑山倒水來 (오애청산도수래) 얼마전만해도 나는 그 바구니에 동전을 집어 넣어주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냥 익숙한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무심히 지나친다. 그래도 흔한 말로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 모습이 정상인가?
김삿갓이 하늘가에 떠돌아가는 한 조각 구름을 바라보며 쓸쓸히 웃고 있었다. 아직 입동절도 아니였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얼음이 얼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옷은 솜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기후였다. 그러나 김삿갓이 계절에 맞춰 옷을 갈아 입을 형편이 못되니 당장 추위를 막아내기 위해서 입고 있는 옷의 해진 구멍을 자기 손으로 꿰매는 수 밖에 없었다. 해진 옷을 기워 입으려고 일찌감치 객줏집에 들렀다. 그리하여 바늘에 실을 꿰려고 했으나 바늘귀가 아물 아물 하여 좀처럼 실이 꿰어지지 않았다. "내 눈이 어느새 이렇게도 어두워 졌는가? " 벌써 50하고도 몇 년을 넘긴 삿갓이였다. 그리고 보니 어젯밤에 등잔 앞에서 책을 읽으려고 했을 때에도 눈이 가물가물 하여 노(魯)자와 어(魚)자를 분간하기가 어렵지 않았던가. 그나 그 뿐이랴! 옷에서 이를 잡으려고 했으나 눈이 어두워 이를 찾아내기 어려울 지경 이였다. 김삿갓은 너무도 처량한 기분이 들어 즉석에서 안혼(眼昏)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한 수 읊었다.
불 앞에서 책을 펴도 노(魯)와 어(魚)를 혼동하네 봄도 아닌 마른나무에 꽃이 핀 듯 보이고 갠 날도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것 같구나. 向針매침絲變索 (향일매침사변색) 挑燈對案魯無魚 (도등대안노무어) 春前白樹花無數 (춘전백수화무수) 霽後靑天雨有餘 (제후청천우유여) 길에서 인사하는 소년 누구인지 모르나 옷을 뒤져 보아 움직이는 이는 아네 가련타 이 늙은이 낚싯대 드리워도 물결이 보이지 않아 미끼만 빼앗기리. 揖路小年云誰某 (읍로소년운수모) 探衣老슬動知渠 (탐의노슬동지거) 可憐南浦垂竿處 (가련남포수간처) 不見風波浪費저 (불견풍파낭비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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