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스크랩] 김삿갓 이야기-자연을 벗삼아

사랑25시 2006. 1. 31. 18:11
      자연을 벗삼아

    몰아일체의 해금강
김삿갓은 공허 스님과 작별하고 해금강으로 오면서도, 이별의 서글픔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세속적인 욕망을 일체 떨쳐 버리고 방랑의 길에 오른 지도 이러저러 3,4년, 문득 하늘을 우러러 통쾌하게 한번 웃고나니 마음이 후련하다. 이윽고 해금강에 당도해 보니 겨울 바다는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저 멀리 바다 위에 떠 있는 솔섬, 까치섬 등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이기는 했으나,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하도 거칠어, 겨울의 바다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은 오직 만경창파 뿐인데, 하얀 모래밭에서는 갈매기들만이 무심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침 그때 어디선가 고깃배 한 척이 구성진 뱃노래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갈매기들은 뱃노래에 놀란 듯 모두들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갈매기와 모래밭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문득 시 한 수를 읊조렸다.
해금강의 천년송 나이가 천삼백 살이란다. 여기 사람들은 수호송(守護松)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갈매기도 희고 모래도 희고 모두가 희어
      모래와 갈매기가 구별조차 어렵구나
      어부의 노래 듣고 갈매기가 날아가니
      그제야 모래와 갈매기가 제각기로다.

      沙白鷗白兩白白 (사백구백량백백)
      不辨白沙與白鷗 (불변백사여백구)
      漁歌一聲忽飛去 (어가일성홀비거)
      然後沙沙後鷗鷗 (연후사사후구구)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면 어찌 이런 시가 나올 수 있겠는가! 내 마음 속의 갈매기가 저 바다위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지금 나는 바닷가 모래 위를 서성이고 있다.




    자연은 진수성찬
김삿갓이 관동과 관북의 접경지대인 안변으로 접어 들 때의 일이다. 관북 땅으로 접어드니, 산세가 더욱 험준하고 인가도 더욱 희소하여 진종일 걸어가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첩첩 태산만이 있을 뿐, 인가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김삿갓은 배가 고프면 솔잎을 따먹기도 하였고, 때로는 칡뿌리를 캐어 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치만은 어디를 가도 절경이어서, 눈요기는 그렇게도 진수 성찬일 수가 없었다.
깊은 산 속을 걸어오기를 사흘만에 처음으로 오막살이 한 채를 발견하였는데, 감자 농사를 지어먹고 살아간다는 그 집은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창호지는 몇 천 년 전 여와씨 시대의 종이처럼 새까맣고, 방안에는 천황씨(天皇氏) 때의 먼지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저녁밥을 특별히 대접한답시고 보리밥을 지어 왔는데, 보리가 몇 십 년이나 묵은 것인지, 보리밥 빛깔이 새빨갛게 절어 있었다.
김삿갓은 하룻밤 신세를 지고 나서, 다음날 아침 그 집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계곡따라 종일 가도 사람 하나 못 보더니
      겨우 겨우 강가에서 초막 한 채를 찾았소
      문에 바른 창호지는 여와 때의 종이요
      비를 들어 방을 쓰니 천황 때의 먼지로다.

      終日綠溪不見人 (종일녹계불견인)
      辛尋斗屋半江濱 (신심두옥반강빈)
      門塗여와元年紙 (문도여와원년지)
      房掃天皇甲子塵 (방소천황갑자진)

      새까만 그릇들은 우나라 때 구운 건가
      새빨간 보리밥은 한나라 때 곡식인가
      떠날 때 주인에게 고맙다 말했지만
      간밤 일 생각하면 암만해도 입맛 쓰네.

      光黑器血虞陶出 (광흑기혈우기출)
      色紅麥飯漢倉陳 (색홍맥반한창진)
      平明謝主登前送 (평명사주등전송)
      苦思經宵口味辛 (고사경소구미신)
현실이 아무리 고달파도 그것을 익살스럽게 시로써 읊어 버리면, 그 나름대로 즐거웠던 김삿갓, 현실이 우리를 괴롭게 할 때가 많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그것은 반비례하는 것 같다. 때로는 웃어버리자. 미친 사람처럼 눈물이 날 정도로 웃고 나면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난 김삿갓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나는 그가 부럽다.




    하얀 눈을 보고
방랑 길을 나선 김삿갓은 제일 우선으로 금강산을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마음속으로 꼭 구경하리라고 다짐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롭지 만은 않기에 가는 도중 돌팔이 훈장 선생한테 발목을 잡히게 되어 백락촌 이라는 마을에서 피치 못해 서당선생님을 맡게 되었다.
그러기를 6개월이 지내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나 마음은 금강산이라.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간밤에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산천초목이 모두 눈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닌가! 쓸쓸한 김삿갓은 눈 속을 혼자 거닐며 시 한 수를 지었다.

      천황씨가 죽었는가 지황씨가 죽었는가
      산과 나무 모두가 상복을 입었구나
      햇님이 소식 듣고 내일에 문상을 오면
      집집마다 처마가 눈물을 흘리리라.

      天皇崩乎人皇崩 (천황붕호인황붕)
      萬樹靑山皆被服 (만수청성개피복)
      明日若使陽來弔 (명일약사양래조)
      家家첨前淚滴滴 (가가첨전루적적)
하얀 눈을 상복에 견준 것이 얼마나 오묘한 비유인가! 거기다가 햇님이 문상을 오면 처마가 눈물을 흘리다니 우리 모두가 느꼈던 것을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마 타고 나는가 보다.




    산속이 무릉도원이라
길을 걷다보니 멀리 산에는 신록이 우거져 있고, 산골짜기에서는 골짜기 마다 옥구슬 같이 맑은 물이 좔좔 흘러내리는 소리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산에 피었던 꽃은 절로 떨어지고 꾀꼬리는 이산 저 산에서 피를 토하듯 극성스럽게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눈앞의 경치에 황홀하게 도취해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한 수 내뿜었다.

      걸음마다 발 멈추며 눈을 둘러보니
      푸른 산 흰 돌 사이 간간이 꽃이로다
      그림쟁이 불러다가 이 경치 그려 본들
      숲속의 새소리야 무슨 수로 그릴꼬.

      一步二步三步立 (일보이보삼보립)
      山靑石白問問花 (산청석백문문화)
      若使畵工摸此景 (약사화공모차경)
      其於林下鳥聲何 (기어림하조성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듯 천하의 그림쟁이도 그릴 수 없는게 있는가 보다.




    금강산1
김삿갓 그가 그토록 바라던 금강산에 도착하니 산골짜기에서는 구슬처럼 맑은 물이 기운차게 흘러 내리고 있고 주위에는 온갖 나무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어디를 보아도 선경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금강산 속의 나무들은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무럭무럭 자라난 귀공자 처럼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나 그뿐이랴!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조차 염불소리, 목탁 소리와 함께 어울려서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아아, 금강산은 산과 물만이 좋아서 명산이 아니라, 염불소리와 목탁 소리와 물소리와 바람 소리도 함께 어울리는 교향악의 전당이기도 하구나! 예로부터 금강산에는 절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한다. 그림 같은 선경 속을 정신없이 걸어가다 문득 눈을 들어보니 저 멀리 산봉우리 위에 하얀 반달이 걸려 있었다. 걸음을 걸어가니 달은 사람을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이태백의 시가 연상되었다.

      하늘에 달이 떠 있기 몇몇 헤던고
      내 이제 술잔 들고 물어 보노라
      사람이 달에는 오를 수 없으나
      달은 저절로 사람을 따라오네.

      靑天有月來幾時 (청천유월래기시)
      我今停盃一問之 (아금정배일문지)
      人攀明月不可得 (인반명월불가득)
      明行却興人相隨 (명행각흥인상수)




    금강산2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시에, "금강산의 참된 면목을 알려거든 석양 무렵에 개성루에 올라와 보라." 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欲識金剛眞面目 (욕식금강진면목) 夕陽須上개惺樓 (석양수상개성루)
개성루 위에서는 금강 1만 2천 봉 중에서 47개의 산봉우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특색 이었다. 김삿갓은 개성루에 올라서서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 과연 남쪽으로 보이는 것은 능허봉(凌虛峰)과 영랑봉(永郞峰) 등이요, 동쪽으로 보이는 것은 일출봉(日出峰)과 월출봉(月出峰) 등이요, 북쪽으로 보이는 것은 백옥봉(白玉峰)과 옥선봉(玉仙峰) 등등이어서 그야말로 장관 그것 이였다. 처음에는 높다란 산봉우리 몇 개만 인 줄 알았는데, 유심히 살펴보니 높은 봉우리들 사이사이로 낮은 산봉우리들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구름이 흘러감에 따라 산봉우리들은 자꾸만 생겨났다 , 없어졌다 하므로, 김삿갓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한 수 읊었다.

      하나 둘 셋 네 봉우리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봉우리
      삽시간에 천만 봉이 새로 생겨나
      하늘 아래 모두 산봉우리 뿐이로다.

      一峰二峰三四峰 (일봉이봉삼사봉)
      五峰六峰七八峰 (오봉육봉칠팔봉)
      須수更作千萬峰 (수수갱작천만봉)
      九萬長天都是峰 (구만장천도시봉)

      태산이 가려 북쪽은 하늘이 없고
      눈앞은 바다여서 땅은 동쪽 끝이네
      다리 아래 길은 사방으로 통해 있고
      1만 2천 봉이 지팡이 끝에 매달렸네.

      泰山在後天無北 (태산재후천무북)
      大海當前地盡東 (대해당전지진동)
      橋下東西南北路 (교하동서남북로)
      杖頭一萬二千峰 (장두일만이천봉)
그나 그뿐인가. 울울창창한 송림 사이에서는 학의 무리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날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눈앞의 풍경이 너무도 황홀하여 잠시 무아경에 잠겨 있는데, 홀연 어느 암자에 서 한낮의 종을 요란스럽게 쳐 갈겨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삿갓은 눈을 활발히 뜨며, 즉흥시 한 수를 또 읊었다.

      푸른 산길 더듬어 구름 속에 들어오니
      다락이 좋아 시인의 발길을 멈추네
      용의 조화인가 폭포소리 요란한데
      칼날 같은 산들이 하늘에 꽂혔구나.

      綠靑碧路入雲中 (록청벽로입운중)
      樓使能詩客住공 (루사능시객주공)
      龍造化含飛雲瀑 (룡조화함비운폭)
      劒精神削揷天峰 (검정신삭삽천봉)

      날아가는 저 학들은 몇천 년 되었으며
      높이 솟은 청송들은 몇백 자나 되는고
      졸고 있던 이 내 심정 스님이 알 길 없어
      한낮에 종을 쳐서 사람을 놀라키네.

      仙禽白幾千年鶴 (선금백기천년학)
      澗樹靑三百丈松 (간수청삼백장송)
      僧不知吾春睡惱 (승부지오춘수뇌)
      忽無心打日邊鐘 (홀무심타일변종)




    그림자
김삿갓은 산골길을 쓸쓸히 걸어가며,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 보았다. 그림자라는 것은 광선을 받기에 따라 형태가 여러 가지로 변한다.
해를 향해 걸어오면 그림자는 뒤에서 따라오고, 해를 등지고 걸어오면 그림자는 앞장서서 걸어간다. 그나 그뿐이랴. 달밤에 보면 그림자는 괴상한 형태로 나타나 보이기도 하고, 어두운 밤이면 어디로 숨어 버리는지 형태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림자라는 것은 언제든지 자기를 따라다니는 충실한 친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길을 걸어가며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읊었다.

      오나가나 너는 항상 나를 따라오는데
      서로가 비슷해도 네가 나는 아니로다
      달빛 받아 길어지면 기괴한 꼴이 되고
      한낮에 뜰에 서면 난장이꼴 우습구나.

      進退隨농莫汝恭 (진퇴수농막여공)
      汝농酷似實非농 (여농혹사실비농)
      月斜岸面驚魁狀 (월사안면경괴장)
      日年庭中笑矮容 (일년정중소왜용)

      베개 베고 누우면 찾아볼 길 없다가도
      등잔 뒤를 돌아보면 다시 만나게 되네
      짬짬이 사랑해도 너는 끝내 말이 없고
      빛이 없는 곳에서는 종적조차 감추네.

      枕上若尋無覓得 (침상약심무멱득)
      燈前回顧忽相逢 (등전회고홀상봉)
      心雖可愛終無言 (심수가애종무언)
      不映光明去絶종 (불영광명거절종)

 
출처 : 블로그 > 양지바른 오두막집 | 글쓴이 : 술래 [원문보기]